[리더십] 719호 - 제자훈련과 소그룹은 Learning Community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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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네상스는 교양혁명입니다. 서구적인 교양의 모태는 고대 헬라 문명입니다. 르네상스의 의미가 바로 다시(re) 태어난다(naissance)는 것입니다. 르네상스의 원래 취지는 희랍의 정신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입니다. 그 운동의 초점은 그리스 고전을 제대로 읽어 보자는 운동과 다름이 없습니다. 당연히 원어, 즉 헬라어 학습을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이 운동의 여파로 말미암아 종교개혁의 시조인 루터는 신약성경을 새로 읽게 되었습니다. 당시에는 모두 라틴어로 번역된 성경을 읽었는데, 그는 신약성경이 기록된 언어였던 헬라어 원전으로 직접 읽었습니다. 그 결과로 왜곡된 장로의 유전들을 깨닫고 혁파했습니다. 그는 투사가 되기를 원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하나님의 말씀을 있는 그대로 선포하고자 했을 뿐입니다. 종교개혁의 시작은 그저 ‘성경으로 다시 돌아가기’였습니다.
한국교회의 미래는 공부에 달렸습니다. 종교개혁의 필요성은 모두가 알고 있지요. 하지만 (르네상스와도 같은) 정신변혁이 먼저 필요하다는 점에 주목하는 분들은 많지 않습니다.

함께하는 독서

이런 성숙의 여정에 나서려면 함께할 참된 친구가 반드시 필요합니다. 이런 친구를 가리켜 도반이라고 합니다. 가르침을 더불어 연마하고, 그 배움의 길을 함께 걷는 벗을 가리킵니다.
영적인 성장과 같은 장구한 목적을 위해서는 필히 도반을 찾아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가는 길이 좁고, 그 닿을 곳이 멀기 때문입니다.
플라톤은 아카데미아의 교장이었고, 아리스토텔레스는 리케이온을 이끌었습니다. 이 사설학원은 사제가 함께 하는 학습의 공동체였습니다. 같이 살고, 같이 먹고, 같이 산책하며 토론했습니다. 스승의 삶을 보는 동시에 학우들이 서로서로 도와가며 배움의 길을 간 것입니다. 예수님도 3년 동안 지속되었던 예수님과 제자들의 공동체에서 당신의 삶과 가르침으로 제자들을 양육했습니다. 예수님은 칠십 인의 제자를 불러 천국의 도래 선포를 위해 파송하시되 둘씩 짝지어 보내셨습니다(눅 10:1~16). 서로가 서로를 돌보면서 사역에 임하라는 것이지요. 열두 제자를 보내실 때(마 10:1~15)에도, 비록 본문에 언급되지는 않았으나, 여전히 둘씩 짝을 지어 주셨으리라 짐작합니다. 더욱이 예수님의 제자들 중에는 이너 서클도 있었고, 이들의 교류는 더욱 두터웠습니다. 실은 경쟁과 질투가 함께 했습니다만, 그만큼 많은 시간을 같이 보냈다는 거지요. 예수님은 이들을 특별히 배려하셨습니다.
함께 모여서 성장을 위해 공부하는 것이야말로 우리 시대의 교회가 서로 사랑하는 모습일 것입니다. 실은 교회가 위기에 처할 때마다 그러했습니다. 경건주의의 소그룹이나, 감리교 초기의 소그룹(밴드)이 바로 그런 사례일 것입니다. 17세기의 경건주의는 ‘교회 안의 작은 교회’를 통해서 경색된 정통주의를 전복하여 교회를 소생시켰습니다. 밴드 모임을 중심으로 성장한 감리교 운동은 침체에 빠진 18세기 영국 교회를 각성시켰습니다.
함께하는 공부가 필요합니다. 그런 공부가 세상을 지키고, 미래를 열어갑니다. 이와 같이 당장의 실용적 목적을 추구하지 않고, 함께 읽고, 함께 암송하는 공동체가 필요합니다.

함께하는 대화

교회 공동체로서 공부한다는 것은 함께 읽는 것으로 시작되고, 함께 나누는 것으로 이어져야 합니다. 그 핵심은 서로 주고받는 대화에 있습니다. 우리는 이미 교회 안에서 친교 공동체로 모이고 있습니다. 의문의 여지없이 서로 모이기를 힘쓰고 있습니다. 친교 공동체는 생활 공동체입니다. 서로의 일상을 공유하며, 웃음과 눈물을 나누기 때문입니다. 정서적인 나눔은 좋은 것이고, 나아가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더 나아가 이 공동체를 학습 공동체로 전환시킬 것을 제안하고 싶습니다.
20세기를 대표하는 기독교 변증가이자 『나니아 연대기』시리즈로 유명한 C. S. 루이스는 ‘잉클링즈’(Inklings)라는 모임을 만들어서 공부와 유희를 병행했습니다. 목요일 저녁마다 모여서 써온 글이 있는 사람마다 발표하고 평가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또한 화요일 점심시간 한두 시간 전에 ‘독수리와 아이’(The Eagle and Child)라는 카페에서 종종 만났다고 합니다. 이 카페는 흔히 ‘새와 아기’(the Bird and Baby)라는 이름으로 불렸습니다. 놀이의 공간으로 인식되었던 것이지요. 다 큰 성인 남자들이 만나서 참 열심히도 수다 떨며 놀았던 모양입니다. 그 수다 가운데 각자의 이야기가 자라고 마침내 작품이 탄생한 것입니다. J. R. 톨킨은 『반지의 제왕』 시리즈를 냈고, C.S. 루이스는 『나니아 연대기』 시리즈를 펴냈습니다. 이들의 끝없는 대화가 결국 창조적인 업적으로 귀결되었던 것입니다.
루터는 홀로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종교개혁이 단 한 사람의 영웅으로 인해 가능했던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르네상스의 영향 속에서 공부하는 일련의 공동체가 형성되었고, 종교개혁 안에서도 서로 공부하며 나누는 공동체가 만들어졌습니다. 달리 생각해 보면, 루터의 종교개혁 또한 애초에 수도원을 통해서 면면하게 흐른 배움의 전통에 힘입은 바가 큰 것입니다. 서로 마음과 생각을 나누는 가운데 하나님의 영이 역사하시고 우리의 실존이 변화합니다.

이원석 씨의 글을 찬찬히 읽다보면 ‘제자훈련’과 ‘소그룹 사역’이 함께하는 공부, 함께하는 독서, 함께하는 대화를 통해 새로운 종교개혁을 일으키는 원동력이 될 수 있다는 확신에 이르게 해줍니다. 사랑하는 리더십 네트워크 독자 여러분들도 이 한 주간 함께 공부하고, 함께 독서하고, 함께 나누며 소박하지만 개혁의 에너지를 쌓아 가시기를 바랍니다.

※이 글은 『 공부하는 그리스도인 』 (두란노, 이원석 저)의 제 3부 “우리의 도반”을 요약 정리한 것입니다. 이원석 씨는 독특한 이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신학을 공부한 사람이면서 한국출판평론상을 수상한 작가이기도 합니다. 한국교회에 종교개혁이 일어나기 위해서는 인문학적 공부가 선행되어야한다고 생각하고 기독교 고전을 연구하는 “톨레 레게”라는 강독 연구 공동체를 운영하며 묵묵히 씨앗을 뿌리고 있는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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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소개

공부하는 그리스도인

인문학 열풍 속에 평생 학습해야 할 그 책을 놓치지 마라! 공부해라, 함께 공부해라, 지금이 그때다! 진정한 교양은 진리탐구에서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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