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반] 2001년 7월 1일 사랑의교회 세례식 간증문 3

저는 지금의 나이 오십이 될때까지 교회와는 별 인연이 없었습니다. 어릴적에 크리스마스 이브에 교회가면 맛있는 것 준다고 누군가가 한 번 데려갔던 기억이 고작이었습니다. 집에서는 돌아가신 아버님이 저 기억안나는 어린시절에 교회 가서 우리 식구 신발 몽땅 잃어버렸다고, 예수 믿는 사람 믿을 바 못된다고 몇 번 말씀하시곤 했던 것이 기억이 납니다. 부모님은 가끔 절에 다니시며 사월 초파일에 등에 우리 이름 적어 놓았다고 얘기를 들었었지만 저는 절에 가본 적은 없습니다. 어릴 적 학교에서 우리 집안의 종교를 물으면 막연히 불교인가보다 생각했었습니다. 별 인생의 뚜렷한 목표도 설정하지 못하고 대학도 다니고 군대도 제대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는 중 사귄 친구들과 어울려 술 잘마시는 자랑하고 다녔고 별 것 아닌 힘자랑도 하고 하는 과정에 취직을 해서 해운회사에 다니게 되었습니다. 그러고 얼마후 아버님이 친구 회사에 모든 돈을 몽땅 투자했다가 전부 잃는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그 전까지는 저희가 비교적 넉넉하고 아무 풍파없이 지냈었는데 그 이후 모든 것이 달라지더군요. 우선 부모님의 사기가 말이 아니게 떨어지셨고 별 동요없이, 걱정도 안하고 무심하게 보이는 저를 아버님이 크게 책망하시곤 했습니다. 저도 속이 무척 상했었지만 젊었을 때라 제 힘으로 일으킬수 있겠지!하고 막연히 생각했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여파가 크게 미쳐오더군요. 건설회사로 옮겨 사우디로 가 보려고 원서도 내 보았고 여러 궁리를 하였지만 회사 생활만 점점 재미없어질 뿐 별수가 없었습니다. 정말 내가 무력하구나 하는 생각이 절실하게 들었었습니다. 얼마후 이듬해 가을에 결혼을 하였고 아내가 교회를 가겠다고 했을 때 흔쾌히 동의했었습니다. 인간이 얼마나 제한된 지식을 갖고 사는줄 깊이 느끼고 있었기에 저는 집사람에게 "비록 나는 별 생각없지만 종교를 부정할만한 지식을 내게 없다"면서요. 그리고 아들과 딸이 생겨 같이 교회에 나갈 때도 오직 저는 데려다만 주었고 데리고만 왔습니다. 교회안엔 들어가지 않았지요. 비록 약한 존재이지만 모르는 세상에 새삼 들어간다는 것이 무척 거북했고 고등학교 시절, 반장하면서 정신질환인 친구를 고쳐보려고 교회를 한 번 갔었는데 마침 교회가 정전이 되어 성도들이 막 소리지르며 기도하는 모습에 너무 생소함을 느껴 그때부터 거부반응을 보여온 것 같습니다. 한편 저희 본가는 사정이 계속 어려워져 저희 가정은 어머니를 모시게 되었습니다. 집도 좁았고 시구도 많았고, 여러 불편한 점을 넘어서서 함께 살게 되었지만 어머니도 불편하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여러해를 같이 살다가 지방에 있는 누이에게 옮겨 갔다하기를 반복하시다가 어느날 지방에서 엉치뼈 밑의 부위가 부러지셨습니다. 처음 다치셨을 때 오랫동안 누워 계시다가 몸시 쇠약해 지셔서 1999년 1월초 며칠간은 괴로운 경험을 온 가족이 겪어야 했습니다. 그것은 어머니가 밤마다 악몽보다도 심한 체험, 아마 악령과의 싸움이 아니었나 지금 생각해 봅니다. 그 상황을 지켜보는 저는 이루 말할 수 없이 괴로왔습니다. 가끔 미움도 싹텄던 어머니와의 관계지만 너무나 불쌍하고 애처로왔습니다. 하루는 보다못해 안방에 혼자 들어가 절규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계시다면 제발 저희 어머니 살려주시고 행복하게 해 주세요"라고 말입니다. 그날 이후 저는 결단했습니다. 그 주에 당장 온 가족이 함께 교회로 나오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후로 어머니의 밤마다의 영적인 시련은 없어지셨고 소극적이고 외부와 단절해 사시던 분이 노인정 생활도 즐기시게 되었습니다. 교회에서는 새가족반도 거치고 오늘은 어머니와 함께 세례를 받으러 나오시기까지 되었습니다. 어머니의 다치신 엉치뼈에는 쇠못이 지금도 박혀있어서 굉장히 불편하십니다. 앉지도 못하십니다. 그러나 이제 저희 어머니와 저는 목사님앞에서 예수님이 미천한 저를 위해서 십자가에 못박히시고 피흘리시고 그 보혈로 저희 죄를 사하여 주신 것을 믿는다고 선언하고자 나왔습니다. 약간 늦은 나이지만 하나님앞에 어린아이 같은 심령으로 세례받고 앞으로 주님을 위해 평생을 드리길 원합니다. 아멘